라이프로그


[책] 정체성 - 밀란 쿤데라 서재

권태에는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수동적 권태 : 춤을 추고 하품하는 소녀, 적극적 권태 : 연 애호가, 반항적 권태 : 자동차에 불지르고 창유리를 깨는 젊은이들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 뒤 부터 샹탈의 죽음은 항상 그의 곁에 있다 ; 그는 이제 그녀에게 손짓을 하며 진짜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 위로 손사랫짓을 하는 남자를 보지 못한채 다시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마주하고는 멀리 떠가는 돛단배를 바라보았따.
마침내 그의 쪽으로 돌아선 그녀가 그를 알아본 것 같았다. 그는 기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는 무심한 채 모래사장을 애무하는 바다의 긴 물결을 눈으로 좇으면서 서 있었다.
그녀의 옆모습을 본 지금에서야 그가 틀어올린 머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머리를 감싼 머플러라는 것을 확인했다. 가까이 다가섬에 따라 그가 샹탈이라고 믿었던 여자가 늙고 추하고 우스꽝스럽게도 엉뚱한 다른 여자로 변해 갔다.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리고 항상 똑같은 놀람 ; 그녀와 다른 여자들과의 차이가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그는 방문을 열었다. 마침내 그녀를 보았다. 이번에는 털끝만치도 의심할 바 없이 그녀이지만 그런데 더이상 예전같지 않았다. 그녀 얼굴은 늙게 변했고 눈길은 이상하리만치 험상궂었다. 마치 해변에서 그가 손짓을 보내던 여자가 이 순간부터 영원히 그가 ㅏ랑하는 여자로 탈바꿈한 듯했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그의 무력함에 대해 징계라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키스를 가로막았던 이 실패한 만남이 과연 실제로 있기나 했던 것일까? 샹탈은 그 소통 불가능했던 짧았던 순간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장 마르크를 혼란에 빠뜨렸던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전혀. 이 에피소드는 다른 수천 개의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잊혀졌다.

난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두 개의 얼굴을 갖는 것에서 어떤 재미를 찾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찌만 아무튼 두 얼굴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노력을 요하고 규율을 요구하는 거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싫건 좋건 간에 잘하고 싶은 야심을 갖고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요. 완벽하게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 일을 경멸하는 게 아주 어렵지요.
나는 두 얼 굴을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한꺼번에 두 얼굴을 할 수는 없어요. 당신 앞에서는 내 일에 비웃는 얼굴을 하지요. 사무실에서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죽은 자를 파묻는 산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즐기고 싶어하지 죽음을 찬양하고자 하는 건 아니에요. 잘 들어둬요 : 우리의 종교는 생의 찬미에요. 생이란 단어는 단어 중의 왕이죠. 이 단어 중의 왕은 모험, 미래 같은 거물급의 단어에 둘러싸여 있어요. 희망이란 단어도 있군요. 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암호명이 뭔지 알아요? 리틀 보이에요. 이 암호를 생각해 낸 사람은 천재예요. 더 좋은 것은 찾을 수 없었을 거예요. 리틀 보이, 어린아이, 꼬맹이, 꼬마라, 이보다 부드럽고 감동적이고 미래에 가득 찬 단어는 없죠.
맞아 알겠어. 폐허 위에 황금빛 오줌을 뿌리는 리틀 보이라는 인물로 의인화되어 히로시마 상공을 날아다닌 것은 바로 생명 그 자체란 말이지. 그렇게 해서 전후 시대가 개막된 거고.

장 마르크는 꿈을 꿨다. 그는 샹탈이 걱정되어 그녀를 찾아 거리를 헤매다가 마침내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고 그녀는 점차 멀어져 갔다. 그는 그녀를 좇아 뛰어가며 그녀 이름을 외쳤다. 바로 몇 발자국 뒤까지 다가갔을 때 그녀가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경악한 장-마르크 앞에는 다른 얼굴, 낯설고 불쾌한 다른 얼굴이 있었다. 그것은 샹탈, 그의 샹탈이 분명했지만 모르는 여자의 얼굴을 가진 샹탈이었으며 그것이 끔찍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그녀를 포옹했고 그의 몸에 그녀를 밀착해쏙 울먹이며 되뇌었다 : 샹탈, 내 사랑하는 샹탈, 샹탈! 그는 이런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그녀의 변형된 얼굴에 잃어버린 옛 모습, 그녀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불어넣어 주려는 듯했다.

샹탈과 그녀의 직장 동료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침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녀는 그의 귀에는 익숙지 않은 큰 목소리로 얘기했고 몸짓은 더욱 빠르고 단호하고 위압적이었다.그는 아침 욕실에서 밤 시간 동안 잃어버렸던 존재를 되찾았는데 늦은 오후 그의 눈앞에서 그 존재는 다시 변질되었다.

그들은 사무실을 나왔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가 알고 있던 샹탈로 돌아왔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다시 만나서 그가 사랑하던 그녀의 모습을 되찾는 순간까지 일정한 길을 통과해야만 했따. 산속에서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만나자마자 그녀와 함께 둘만 있을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만약 단둘이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그녀를 오랫동안 접했다면 과연 그녀에게서 사랑받는 존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그녀나 동료나 상사나 부하 직원에게 보여주는 얼굴만 보았다면 그 얼굴도 그를 감격하게 하고 경탄하게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그는 대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아무리 해주어도 소용없고 사랑에 가득한 시선도 그녀에겐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의 시선은 개체화된 시선이기 때문이다. 장-마르크는 서로에게 투명하게 변한 두 늙은이의 사랑스런 고독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 호감이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이다. 이런 시선들이 그녀를 인간 사회 속에 머무르게 하고 사랑의 시선은 그녀를 사회로부터 유리시킨다.

샹탈은 그녀의 오랜 메타포를 수정했다. 남자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것은 비물질적이며 시적인 장미향이 아니다. 일군의 박테리아와 더불어 정부의 입에서 그의 애인의 입으로, 애인의 입에서 그의 부인의 입으로, 부인의 입에서 아기의 입으로, 아기 입에서 아줌마의 입으로,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인 아줌마의 입에서 그녀가 침을 뱉은 수프를 마신 고객의 입으로, 고객의 입에서 그의 부인 입으로, 거기서 다시 다른 입으로, 이렇듯 우리 각자가 우리를 하나의 타액 공동체, 축축하고 통일된 유일한 인류로 만들어주는 침의 바다 속에 빠져 살듯 물질적이고 산문적인 침이 자신의 꿈이라고 정정했다.

그녀가 거의 잊어버렸던, 모든 남자에게 키스하고자 갈망하는 희마한 장미향을 그녀는 느꼈다.

죄수들, 박해받는 자들, 굶주린 자들에 대해 누가 설교를 할 때 그들의 고통에 개인적으로 절실하게 감동받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그는 안다. 샹탈이 그들의 입장이 되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내란 중에 강간당한 여자들이 있다고? 그는 강간당한 샹탈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를 무관심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이다.

당신은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

관습주의가 악이고 비 관습주의가 선이라고 어떤 심판관이 결정했어요? 관습에 따른다는 것은 타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요? 관습주의, 이것은 모든 것이 수렴하고 삶이 더욱 밀집되고 더욱 치열한 커다란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아닐까요?
이 땅에 태어난 것이 행운이건 불행이건 간에 여기서 삶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순간 내가 그렇듯 명랑하고 시끄러운, 앞서가는 군중 속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자유는 회한과 쾌감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다고.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우리의 운명이니 그것을 결점처럼 끌어안고살지 말고 즐기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 

누가 꿈을 꾸었는가? 누가 이 이야기를 꿈꾸었는가? 누가 상상해 냈을까? 그녀가? 그가?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현실 속의 삶이 이런 뻔뻔스런 환상으로 변형되었을까? 열차가 영불해협 아래로 들어갔을 때? 그보다 일찍? 그녀가 극에게 런던행을 선언했던 아침일까? 그보다 더 먼저일까? 필적 감정사 사무실에서 그녀가 노르망디 카페의 남자 종업원을 만난 그날부터? 아니면 그보다 더 먼저일까? 장-마르크가 그녀에게 첫번째 편지를 보냈던 때였을까? 하지만 그가 정말 그 편지를 보냈을까? 아니면 단지 상상 속에서만 썼을까?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경계선이 있을까?







-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직업적으로 만난 사람들을 향한 최소 두가지 얼굴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시대에 살고있다.그 속에서 어느정도의 재미를 찾았고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샹탈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노력을 요하고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장마르크는 그녀의 두 얼굴을 알게 됐고 내가 사랑하는 모습의 샹탈의 다른 면을 보면서 내가 사랑하는 이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직장에서의 성격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해변에서 다른 여자를 샹탈로 착각한 것을 보면 외적인 모습 까지 혼란스러워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샹탈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만을 알았었더라면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샹탈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됐을지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샹탈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그런 샹탈을 보면서 장마르크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몰라 고민에 빠져있다.

또 샹탈은 장마르크가 쓴 편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아보다 두번이나 착각하고 만다. 확신에 차서 틀림없다고 생각하던 모습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마는 두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타인을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건지, 또 연약한 토대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짓고 마는, 어찌보면 멍청하고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에서는 또 꿈이었던건 아닌지, 어디서 부터가 현실이고 꿈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넣은 작가의 의도는, 정체성을 의심받고 확신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면서 내가 타인을 잘 안다고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지으려 하는 우리의 불쌍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한 번 더 꼬집어 준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또 더이상 눈을 떼지 않고 쉴새없이 바라보겠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겠다. 는 얘기를 하면서 늘 깨어있게 된다면 내가 누구인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체성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샹탈의 아들의 죽음과 이혼, 남자들이 더 이상 자기를 쳐다보지 않는 것 같다는 말, 남자들 사이를 누비고 싶어하는 장미향 같은 모습, 관습주의를 따르고 사람들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샹탈이 자기가 진정 원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굳이 정체성이란 제목을 이 주제에 넣어보자면, 타인이 보는 샹탈 자신의 정체성을 벗어나, 본연의 모습을 찾고 싶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샹탈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전 남편과의 삶은 맞춰주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군소리하지 않고 장마르크가 사랑하는 샹탈의 모습이 아닌 다른 얼굴의 샹탈로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 아들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평생 그렇게 살았을 거라는 말이 짠하고 안타깝게 느껴졌으니 아마도 작가 역시 그 모습이 좋은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들의 죽음과 리틀보이 라는 원자폭탄이 묘하게 이어지는 듯 하면서 죽음과 동시에 샹탈에겐 새로운 생명과 삶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샹탈이 원하던 삶의 모습은 한 사람에 매인 삶이 아니라 여러 남자들로 표현되는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남자들이 자기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말은 사람들 속에서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게 되는 현실을 말하는 것 같고 그런 삶이 샹탈은 싫었던 것 같다. 이것 역시 굳이 정체성과 결부시켜보자면 전 남편과 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나의 뚜렷하고 명료한 모습 즉 샹탈만의 정체성 없이는 남자들 속에서 사는, 샹탈이 원하는 그 삶을 살 수 없다고 느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삶의 시작은 장마르크의 시라노 편지가 도착했을 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장마르크가 만들어낸 시라노라는 인물을 통해 예전에 원했지만 그동안은 잊고 있었던 장미향을 다시 기억해내게 되는 샹탈을 보면서, 내가 원하는 정체성, 나라는 정체성이 타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을수 있겠고 이 모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자는 이런말을 했다.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된다 (여물위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내 정체성을 알아 갈 수 있으니 타자와의 만남을 꼭 나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타자란 아마 사랑하는 사람 장 마르크가 되지 않을까.

장 마르크 역시도 자신이 조작한 시라노의 편지 때문에 영국으로 샹탈을 찾아가게 된다. 여기서 샹탈의 이름을 집 앞에서 두번 외치면서 그동안 헷갈려하던 샹탈의 모습이 아니라, 진짜 샹탈을 찾게 된다. 작가가 이모습을 의도한 바는 아마, 장마르크의 샹탈을 사랑하는 마음이 시라노 편지를 생각해 내게 되었고 그 사랑 덕분에 서로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다가 아닐까.  아닐수도 있지만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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