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책] 소년이 온다 - 한강 서재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때리고 찌르고 총을 쐇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P17

의무를 피하고 싶어 너는 주저한다. 이 순간이면 언제나 주저했다. 피와 진물로 꾸덕꾸덕 얼룩진 흰 무명천을 들추면 길게 찢긴 얼굴, 베어진 어깨, 블라우스 사이로 썩어가는 젖무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밤이면 그 모습이 선연히 떠올라, 본관 지하 식당에서 의자를 붙여놓고 잠들었다가도 퍼뜩 눈이 떠졌다. 총검이 네 얼굴을, 가슴을 베고 찌르는 환각에 몸을 뒤틀었다.p44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P52

캄캄한 이 덤불숲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내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었던 그 밤의 모든 것. 늦은 밤 창문으로 불어들어오던 습기 찬 바람, 그게 벗은 발등에 부드럽게 닿던 감촉. 잠든 누나로부터 희미하게 날아오는 로션과 파스 냄새. 삐르르 삐르르, 숨죽여 울던 마당의 풀벌레들. 우리 방 앞으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커다란 접시꽃들. 네 부엌머리 방 맞은편 블록담을 타고 오르는 흐드러진 들장미들믜 기척. 누나가 두번 쓰다듬어준 내 얼굴. 누나가 사랑한 내 눈 감은 얼굴. P55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어떻게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P80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p95

오늘은 여섯번째 따귀를 잊어야 하는 날이지만, 이미 뺨은 아물어 거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내일이 되어 일곱번째 따귀를 잊을 필요는 없었다. 일곱번째 뺨을 잊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P98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P101

나는 모릅니다 왜 그는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 있는지p108

김진수의 생각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으리라고 예상하면서도 도청 밖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왔던 걸까요. 아니면 나처럼, 죽을 수도 있지만 살 수도 있다는 생각, 어쩌면 도청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생 동안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낙관에 몸을 실었던 걸까요. P113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p116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저는 그 폭력의 경험을, 열흘이란 짧은 항쟁 기간으로 국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르노빌의 피폭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몇십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p162

사년 동안 지방 도시의 양장점에서 숨어지내며 간첩 지령을 받아왔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당신을 조사실 탁자에 눕혔다. p170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 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p173

그라고 삼십년이 흘러가도록, 너하고 느이 아부지 기일에 그 자석이 가만히 서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야. 네가 죽은 것이 저 때문이 아닌디, 왜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어깨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까이. 저것이 아직도 원수 갚을 생각을 하고 있단가, 생각하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P182

그 뒤로 어떤 말들이 더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표정, 가장 끔찍한 이야기를 덮어두고 말을 이어가는 일의 어려움, 어색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기억한다. 아무리 말을 돌려도 어느새 처음의 오싹한 빈자리로 되돌아오는 대화에 나는 이상한 긴장을 느끼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르치던 학생네가 중흥동 그 집을 샀다는 건 나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는가? 왜 그 학생의 이름을 말하기 직전에는 알 수 없는 망설임이 끼어드는가? P194

너무 늦게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곳의 바닥이 파헤쳐지기 전에 왔어야 했다. 공사 중인 도청 건물 바깥으로 가림막이 설치되기 전에 왔어야 했다. 모든것을 지켜본 은행나무들의 상당수가 뽑혀나가고, 백오십년 된 회화나무가 말라 죽기 전에 왔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왔다. 어쩔 수 없다.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해가 질 때까지 여기 있을 것이다. 소년의 얼굴이 또렷해질 때까지.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안 보이는 마룻장 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어른어른 비칠 때까지. P200

그 소년 역시 너무 평범해 누구와도 혼동될 것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시절, 머리를 깎고 교복을 입은 소년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순한 외꺼불 눈은. 키가 크느라 야윈 볼과 기름한 목은.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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