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책]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p28 소중한 것은 스처가는 것들이 아니다. 당장 보이지 않아도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들이다. 언젠가는 그것들과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

p29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인가. 그 큰 사랑이 내리 내리 아래로만 흘러간다. 그런 줄도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라 집을 떠나고 어린 새들은 날개를 퍼덕여 날아가는 것이다.

p33 내가 삶이라는 건 직선의 단순한 길이 아니라 곡선의 복잡한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때다. 그거 사랑이든 복권당첨이든, 심지어는 12시 가까울 무렵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든 기다리는 그 즉시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효율성과 경제성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검토하자면 삶이라는 건 대단히 엉성하게 만든 물건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원하는 순간에 얻을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깔끔할까?

p39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해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뿐, 푸른 하늘에도 별은 떠 있듯 평온한 이 삶의 곳곳에는 죽음이라는 웅덩이가 숨어 있다.

p68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된다.
벽이란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져 사는 것, 그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라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역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잘산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p84 내게 천냥 돈은 없었지만, 내게는 반드시 쓸, 하늘이 내린 재주만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나는 내가 오만으로 똘똘 뭉친,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내가 황영조 마을까지 가서 본 것은 결국 내가 그 무엇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라는 그 세 마디는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p90 혼자서만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운명이 굳이 지금 세상을 떠나라고 해도 그다지 아쉬울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우리 모두에겐 남아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 일이 반복되는 한, 슬픔은 오랫동안 지속되리라. 아이는 구급차를 못 쫓아왔네 라는 문장은 그처럼 오랫동안 지속되는 슬픔의 한 모습이다. 시간은 그렇게 지속된다.

p99 인생의 대상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라.
매순간 환희를 맛보라!
오, 사키여! 내일의 양식을 걱정하지 마라.
잔을 돌려 포도주를 붓고, 내 말을 들으라. 밤이 가고 있다.

p106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거나 처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갓 태어난 아이의 눈과 귀처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시간이 있다. DJ 인혁의 강의를 듣던 그때가 바로 내게는 처음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흘러나오는 모든 노래가 경이롭게 들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p132 이삿짐 트럭을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그 언덕에서의 삶이 내겐 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p136 그 집의 식구들은 모두 스물넷에서 서른두 살 사이의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으나 다음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 있는 나이. 그래서인지 우리는 금방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친해질 수 있었다.

p157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p180 하지만 이백이 못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10년 전 그 스님은 농담하느라 내게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어려울 때, 내게는 그 얘기가 있었다. 고마웠다. 어려워 당장 그만둬야 했을 때, 스님은 내게 4년을 더 준 셈이니까. 유석로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그에게 용기가 될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테다.

p191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열여덟 살의 11월에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단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사랑했던 것이며, 사랑하지 못할까봐 안달이 난 것이었다.
사실은 지금도 나는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p202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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